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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펌> 다섯 가지 깨달음 / 서정홍

청포도58 2018. 5. 2. 16:24


<펌> https://www.nongmin.com/opinion/OPP/SWE/ESY/289739/view


[전원에서 띄운 편지] 다섯가지 깨달음


 

농부된 뒤 사람 냄새를 맡고 농사일하며 욕심 버리게 돼

꽃처럼 삶도 지는 날 오는 법

사람은 돈보단 밥이 중요하고 스승은 가까이 있는 것 깨달아



엊그제 부산귀농학교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다가오는 28일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농부학교 수강생 30여명이 1박2일 동안 농사체험 온다기에 열매지기공동체 회원들과 회의를 했습니다. 5월3일은 전북 순창귀농학교, 17일은 광주전남귀농학교, 26일은 전북 익산 성일고등학교 강의가 잡혀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농사일이 가장 많은 유월이 아니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민단체나 학교에서 산골 농부를 귀하게 여겨 가끔 불러줍니다. 그럴 때는 ‘도시 소풍’ 삼아 설레는 마음으로 다녀오곤 합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나이와 직업과 지역을 떠나 언제나 마음 설렙니다. 사람을 만나야만 오염된 환경을 살릴 수 있고, 무너져가는 우리 농업과 농촌도 살릴 수 있고, 정치·경제·교육을 살리고, 비틀거리는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살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농부가 되지 않았다면 아무도 저를 불러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메마른 도시 시멘트 건물에 갇혀 입으로만 생명이니 환경이니 희망이니 떠벌리며 돌아다녔더라면 누가 저를 불러주겠습니까? 삶이 늘 서툴고 모자라지만 가장 큰 스승인 자연 속에서 자연을 따라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에 저를 ‘사람’으로 불러주는 것입니다.

저는 농부가 되고 나서 깨달은 게 참 많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달은 것은 죽을 때까지 몸속에 있는 세포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한다고 합니다.

첫번째 깨달음은 내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도시에서 살 때는 단 한번도 내 몸에서 사람 냄새를 맡지 못했습니다. 그저 바쁘고 고달프게 살아온 탓도 있지만, 사람 냄새가 어떤 냄새인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과 자연을 섬기지 못하고, 늘 경쟁에 지쳐 나를 스스로 괴롭히고, 나를 괴롭히는 만큼 다른 사람을 괴롭히며 살았으니 어찌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산밭에 잡곡을 심으려고 괭이로 두둑을 만들 때마다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비 오듯이 흐릅니다. 그 땀 냄새가 바로 사람 냄새라는 걸 농부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만일 제가 농부가 되지 않았더라면 죽을 때까지 사람 냄새 한번 맡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두번째 깨달음은 농사일을 할 때는 쓸데없는 욕심과 잡념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랑을 갈고 씨를 뿌리고 풀을 맬 때는 내가 저절로 착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농사일은 나를 착하게 해주는 신비한 힘을 가졌습니다.

세번째 깨달음은 머지않아 나도 꽃처럼 소리 없이 진다는 것입니다. 직업 가운데 농부들이 죽음을 가장 편안하게 잘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해마다 들녘에 꽃이 피고 지는 걸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죽음을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네번째 깨달음은 사람은 돈·권력·명예 따위에 기대어 사는 게 아니라 밥 숟가락에 기대어 산다는 것입니다. 밥 한숟가락 먹으면 살고, 먹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감기몸살 때문에 밥 한숟가락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사흘 밤낮을 꼼짝 못한 채 끙끙 앓고서 그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다섯번째 깨달음은 ‘따라 살고 싶은 스승’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평생 명함 한장 만들지 않고, 외국 여행 한번 다녀오지 않고, 하느님이니 부처님이니 환경운동이니 생명운동이니 떠벌리지 않고, 그저 자연의 순리에 따라 검소한 삶을 살아오신 마을 어르신들이 바로 스승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자연이 베풀어준 은혜를 알고 그래서 정이 흘러넘치는 산골 할머니들 말씀을 듣다보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이 할마시는 이제 늙어서 갈 데가 없어야. 산으로 가는 일밖에 없구마. 한평생 산에서 나오는 물 마시고, 산에서 자라는 나물 캐서 묵고, 산에 기대어 여기까지 왔는데, 산에 묻혀 산이 되어야제.” “야야, 이웃집에 사람 있는 시간에는 생선 굽지 말라고 했구마. 생선 냄새 풍기면서 나눠 먹지 않으모 미안치. 아이고, 가난한 이웃들 보기 미안해서 우찌 얼굴 들고 다닐 수 있겄노?”

서정홍 (시인)






출처 : 정가네동산
글쓴이 : 정가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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