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장석주 , '모란이 필 때 보았던 당신'

청포도58 2024. 5. 14. 19:25

 

 
 장석주, '모란이 필 때 보았던 당신'...

여름 초입인데,햇빛은 벌써 빙초산같이 뜨겁습니다.
정수리를 꿰뚫듯 작렬하는 땡볕 아래에서 존재 자체가 곧 녹아내릴 듯 합니다. 서운산 산딸나무는 흰꽃을 피우고,산벚나무 열매는 까맣게
익어갑니다.

오전 내내 감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던 유혈목이는 그늘진 수도가 시멘트 바닥에서 엎드려 쉬고 있습니다.
물통을 들고 나가다가 그의 휴식을 방해할까봐 돌아섭니다.
해가 울울창창한 밤나무숲 너머로 지고,황혼이 새의 깃털처럼 떨어지겠지요.

날개 달린 것들은 공중에 떠서 날고, 더위에 지친 날개없는 것들은 지상에서 고즈녁한 저녁을 맞습니다. 내 안의 있는 노동자도 문설주 아래로 내려오는 초록늑대거미를 바라보며 고요합니다.

이 저녁 당신은 멀리 있고 나는 박복한데 그 박복이 데면데면하기만 합니다.

이 불운과 박복을 위로하려면 심오한 기쁨이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유리감옥 주홍빛 떨림에 갇힌"(보들레르)포도주를 한 병
땄습니다.

그 붉은 포도주가 내 영혼으로 들어와 불러줄 "빛과 우애 가득한 노래 한 곡"을 기다립니다.모란이 필 무렵에 잠시 보았던 당신,지금은 그 노래의 후렴처럼 아득하기만합니다.

낮에 안성 시내에 나가 콩국수를 사먹고, 마침 장날이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삼죽에서 온 할머니가 벌여놓은 노점에서 잡곡 몇 가지, 호박,가지, 감자 따위를 샀습니다. 저녁이 되니 더위를 가시게 하는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쳐 나무들이 살랑댑니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한 구절, "바람이 분다,살려고 애써야만 한다"가 저절로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습니다. 결국 내가 삶에 지나치게 편향된 인간이란 걸 실토하지 않을 수 없네요.

모는 것을 버리고 비워서 얻은 자유에 대해 숙고합니다.

잘살았다고,스스로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떠나고 싶습니다.

바둑에서 일국(一局)의 승패는 덧없는 것이지요.결국은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원하라,가질 수 있느니!', 젊은 날에는 그렇게 뭔가를 쥐려고 열망했고,그 열정으로 여기까지 왔겠지요.

소유하는 자는 결국 소유 당한다는 깨달음을 갖게 된 건 다행이지요.

이에 적게 소유하며 한량으로 사는 것의 자유로움만이 내 것 입니다.

그래서'원하지 마라' 자유롭게 되리니!라는 금언을 자꾸 중얼대는 것이지요.

어느덧 밤입니다. 섬돌밑에서 풀벌레 노래는 높고, 달은 조도(照度)를 한껏 높인 채. 뜰에 서성입니다. 어두운 수풀 위로 반딧불이가 날아와 군무를 추었습니다.

집 안팎의 불들을 다 끄고오래 그 군무를 감상했습니다.

그러다가다시 불을 켜고 [논어]를 읽었습니다.

공자는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에는 마치 조상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하고,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는 마치 신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그게 '예(禮)라는 것이죠.
늦도록 책을 읽고 깜빡 덧창을 닫는 걸 잊은 채 잠이 들었나봅니다. 새벽에 서늘한 기운에  깨어나 덧창을 닫고 다시 무명이불 속으로 들어가 남은 잠을 청합니다. 수백마리의 새떼가 날아와 지저귀는 소리에 깨어나는 이 청량한 아침의 아늑한 낮잠이라니!

나이를 먹는데도여전히 꿈을 갖는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요.

그리스 여행을 위해 그리스어를 배우는 당신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나는 삼백가지의 꿈을 꾸고, 이백아흔아홉개는 버렸습니다.

그것들은 끝내 이루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나를 만든 건 바로 기어코 이룬 한 개의 꿈이 아니라 그 이백아흔아홉개의 덧없이 버려진 꿈이었지요.
'자신이 쓰지 않은 작품 속 주인공처럼 사는 법을 배우라'(에픽테토스)고 하는데 잘산다는 것은 뭐,그런 걸까요?

삶을 만드는 건 우리가 걸어온 길이겠지만,정작 우리 마음을 끌고 가는 건 가보지못한 그 수많은 길들 아니던가요?

풀잎에 맺힌 이슬은 함초롬하고,빨래들은 잘 마르고, 잠은 달콤합니다. 여름에 이루어지는 이별의 예식들은 짧아야만 합니다.

여름은 생각보다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와 추분 사이에서 황국(黃菊)과 뱀들의 전성시대는 짧게 끝나고 나무들은 저마다 제 발등 아래에 유순한 그림자를 키우겠지요.

뜰안 대추나무 가지마다 매달린 대추들에 붉은 빛이 감돌겠지요.

그리고 곧 동지(冬至)의 밤들이 서리와 초빙(初氷)과 첫눈을 몰아오겠지요. 오늘밤도 당신에게 숙면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수졸재에서
엎드려씁니다.

--장석주 "내 인생의 마지막 편지" 경향신문 201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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