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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프란치스코와 키케로가 가르쳐준 `빛나는 노년` / 고미숙

청포도58 2016. 2. 22. 10:40

 

<펌> 한겨레 2014. 9. 15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55088.html

 

프란치스코와 키케로가 가르쳐준 ‘빛나는 노년’

 

 

내 서재 속 고전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키케로 지음, 천병희 옮김
숲 펴냄(2005)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지난 8월 중순, 한국을 다녀간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이다. 이 메시지가 잘 보여주듯, 교황의 행보는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을 비롯하여, 장애인, 위안부 할머니 등 소수자들에 대한 깊은 연대와 공감으로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내가 주목한 것은 그분이 70대 후반의 노인이라는 사실이다. 즉, 노년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울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 그 어떤 메시지보다 감동적이었다. 덕분에 생로병사의 리듬을 되새겨볼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하루가 모여 한달이 되고 세달이 모이면 한 계절이 된다. 사계절이 흐르면 일년이 되고, 그 일년들이 모여 일생이 된다. 일년이 사계절이듯, 하루도 사계절이고 일생도 사계절이다. 생로병사가 곧 춘하추동 아닌가. 산다는 건 이 리듬을 따라 흘러가는 일이다. 청년은 청년답게, 노년은 노년답게. 이것이 인생이고 또 자연이다. 어떻게 하면 이 자연스러운 리듬을 구현해낼 것인가. 인류는 오랫동안 이 과제를 탐구해왔다.

 

예컨대, 인도의 브라만교에선 일생을 네 개의 주기로 나눈다. 학습기, 가주기, 임서기, 만행기. 청년기엔 배움을 익히고, 중년엔 집안을 경영하고, 오십 이후엔 숲에서 명상을 하고, 노년엔 천하를 떠돌며 지혜의 씨앗을 뿌린다. 이것이 인생에 내재한 자연스러운 율동이자 단계라는 것.

 

한편, 우리에게 좀더 익숙한 것은 공자의 일대기다.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志于學), 서른에 두 발로 서고(而立), 마흔에 미혹에 빠지지 않고(不惑), 오십엔 천명을 알고(知天命), 육십에는 귀가 순해지며(耳順), 칠십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從心所欲不踰矩), 이것이 공자가 밟은 생의 스텝이다. 요컨대, 어떤 방식이건 이렇게 리듬을 탈 수 있어야 비로소 노년의 삶이 빛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천병희 옮김)도 그런 지혜의 산물이다. 키케로는 말한다. ‘인생과 자연의 길은 하나뿐이며, 그 길은 한번만 가게 되어 있네. 그리고 인생의 매 단계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한데, 이런 자질들은 제철이 되어야만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라네.’ 이렇게 정리하면 노년은 결코 하위개념이 아니다. 청춘이 아무리 아름답고 힘차다 한들 거기에서 원숙함은 불가능하다. 원숙함이란 능력이나 재능 따위가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흘러간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노년에 대한 새로운 전제라면, 다음은 우정이다. “인생에서 우정을 앗아가는 자들은 말하자면 세상에서 태양을 앗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네. 불사의 신들이 인간에게 준 선물들 가운데 우정보다 더 좋고 더 즐거운 것은 없기 때문이네.” 인생의 태양? 신이 준 최고의 선물? 우정에 대한 가장 고매한 수사학이라 할 만하다. 그만큼 보편적인 가치라는 뜻이리라. 그 보편성을 깨우치려면 시간의 무르익음이 필요하다. 해서, 우정의 윤리는 노년의 원숙함과 짝을 이룬다.

 

원숙함이란 재능 따위가 아니라
시간이 허락하는 미덕이다
욕구가 잦아드니 결핍 또한 없다
노년의 삶은 대화와 탐구로 채워진다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교황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청빈과 자유, 평화와 깨달음…
오래전 키케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저자인 키케로는 로마제국의 웅변가이자 수사학자다. 고전라틴 산문의 창조자라는 평을 들을 정도의 대문호다. <노년에 관하여>와 <우정에 관하여>는 별개로 쓰여진 저술이지만 둘 다 말년에 평생의 친구였던 앗티쿠스(아티쿠스)에게 헌정한 대화록이다. 대화체의 생동감과 라틴어의 운율이 만났기 때문일까. 이 작품은 ‘시보다 더 시적인’ 산문으로 그득하다. 해서 눈으로만 읽기는 너무 아깝다. 읽다 보면 저절로 입이 근질거려 낭송을 하고 싶어진다. 사실 고전의 모든 문장들은 낭송을 염원한다. 그 문장들 속에는 내 몸과 세계를 이어주는 소리와 파동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노년에 관하여>. 예나 이제나 사람들은 노년을 두려워하거나 경멸한다. 노년을 청년의 결핍으로 여기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쾌락을 즐기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다. 거기에 대한 키케로의 태도는 아주 단호하다. “세월이 정말로 젊은 시절의 가장 위험한 약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해준다면, 그것은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얼마나 멋진 선물인가!” 쾌락은 인생의 특권이 아니라 약점이란다. 더 나아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역병 가운데 쾌락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없다.” 오호, 쾌락을 역병에 비유하다니, 그야말로 통념의 전복이다. 그렇다면 금욕을 강변하는 것인가? 아니다. 금욕은 어떤 점에서 쾌락의 또 다른 짝이다. 하여 금욕의 기준이 엄격해질수록 쾌락에의 유혹도 커지는 법이다. 쾌락도 금욕도 아니라면 대체 어떤 길이? 오직 스스로 열어가야 한다. 그 스승은 자연이다.

 

이미 연로한 소포클레스에게 누군가 물었다. 아직도 성적 접촉을 즐기느냐고. 그에 대한 소포클레스의 응답. “아이고 맙소사! 사납고 잔인한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처럼 이제 나는 막 거기서 빠져나왔소이다.” 그렇다. 쾌락은 거칠고 난폭하다. 거기에 휘둘리면 노예처럼 끌려다녀야 한다. 그리고 그 여정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노년이 되면 이제 그 난폭한 주인에게서 해방될 수 있다. 욕구가 자연스럽게 잦아드니 결핍 또한 없다는 것. 그러므로 노년이란 ‘마음이 성욕과 야망 등 온갖 전투를 다 치르고 난 뒤 자신과 더불어 화해하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노년의 삶은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친구들과의 대화’, 그리고 ‘왕성한 탐구열’. 키케로는 말한다, ‘천지만물은 모두 우정에 의해 연결된다’. 또 ‘우정이 싹트고 자라는 토양이 바로 지성이다.’ 이런 이치를 터득해가는 것이 지혜다. 노년의 원숙함과 평화는 여기에서 비롯한다.

 

이 자연의 이치를 망각할 때 노년은 한없이 비루해진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우리 시대가 그렇지 않은가. 동안열풍과 성형중독이 보여주듯이, 우리 시대는 오직 젊음에 대한 열광 혹은 늙음에 대한 경멸이 난무한다. 올해 최고의 히트작인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은 무려 400살이나 먹었음에도 절대동안이다. 그리고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직 첫사랑의 추억 속에서 맴돈다. 당연히 노년의 지혜 같은 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죽음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도 없다. 다음을 낭송해보라.

 

“시간과 날과 달과 해는 흘러가고, 과거는 돌아오지 않으며,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수명에 만족해야 하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무엇이든 선으로 간주되어야 하네. 한데 노인들이 죽는 것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마치 과일이 설익었을 때에는 따기가 힘들지만 농익었을 때에는 저절로 떨어지듯이, 젊은이들에게서는 폭력이, 노인들에게서는 완숙이 목숨을 앗아간다네. 그리고 내게는 이런 ‘완숙’이란 생각이 너무나 즐거워, 죽음에 다가갈수록 마치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육지를 발견하고는 항구에 입항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네.”

 

그렇다. 노년도, 죽음도 생의 자연스런 리듬일 뿐이다. 물론 그 이치를 터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터득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친구가 필요하다. 함께 생사와 우주의 원리를 탐구할 수 있는! 하지만 이 친구의 범위에는 반드시 청년이 포함되어야 한다. 노인과 청년의 우정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은 없다.

 

고미숙 고전학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 먼 길을 달려온 것도 아시아 청년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청년들 역시 그에게 열광적으로 화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은 아이돌’이라는 유머가 결코 무색하지 않았다. 노년과 청년의 만남은 그 자체로 희망이요 메시지다. 청년들은 교황을 보며 생각할 것이다. 저 나이에 이르면 교황과 같은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거라고. 늙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생의 축복이자 자연의 은총이라고. 교황이 트위터에 올린 한국어 인사말-“한국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특별히 노년층과 젊은이들에게”-도 그런 맥락에서 깊이 새겨볼 만하다.

 

교황이니까 가능하다고 말하지 말라. 교황의 메시지는 지극히 간단하다. 청빈과 자유, 우정과 유머, 평화와 깨달음 등. 아주 오래전 키케로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한 메시지와 다르지 않다. 또 그것은 우리 모두의 본성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잠들어 있는 본성을 일깨우는 일일 뿐!

 

- 고미숙 고전학자

 

출처 : 정가네동산
글쓴이 : 정가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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