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일기/고정희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에, 나는 차분하지 못하여
그 집의 너른 유리창가에 앉으면
바람 부는 창밖은 딴 세상의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잔조롭게 흔들리는 산목련 줄기 사이로
휙 가로지르는 새도 새려니와
붉레불그레 물드는
찔레꽃 이파리를 무심히 바라다보던
울컥하고 치미는 눈물 또한 어쩌지 못했다
후르르후르르 산목련 줄기에서 흔들리는 건
산목련잎이 아니라 외줄기 내 영혼이었기
오래오래 나는 울었다
어둠이 완전히 창을 지워버렸을 땐
넋장이 무너지듯 내 아픔도 깊어져
하염없는 슬픔으로 어깨기침을 했다
누군들 왜 모르랴
어두워지는 건 밤이 아니라
속수무책의 한 생애
무방비 상태이 우리 희망이거니
그 집의 주인은 조용히 다가와
너른 창에 커튼을 내리고
내 좁은 어깨를 따뜻이 감쌌다
(새도 날기 위해 날개를 접는 거란다. 빛과 어둠이 하나이듯 말이야)
문득, 신경통에 좋다는 골담초 꽃망울이
걷들건들 흔들리는 고향집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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