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연가(戀歌)/고정희

청포도58 2020. 2. 19. 12:20



연가(戀歌)/고정희



아픈 머리에 열이 가라앉고

창마다 환하게 불빛 고이는 저녁

겨울 난롯불에 내 혼을 쬐며 고린도전서 13장을 펴면

내 진실의 계단 어디쯤서 너는 오고 있는가

어둠을 쓰러뜨리며 난롯불은 조금씩 내 피를 덮히고

꿈틀이며 꿈틀이며 타고 있는 글자들


구름이 가는 곳을 묻고 싶은 황혼쯤

엉겅퀴 울타리를 밟고 가는 바람처럼

내 안에 서걱이는 한무더기 공허

한무더기 공허로도 비칠 수 없는 얼굴

불심지 휘감아도 살속 캄캄한 어둠 목구멍을 채우네


지구 가득 부신 햇빛 부려놓고

노을을 물들이는 태양이여

산마루 넘어가는 태양이여

눈은 눈으로 구름은 구름으로 떠나고 있을 때

나무들 우쭐대는 진종일 바람은 바람으로 만나고 있을 때

내 깊은 눈물샘 어디쯤서 물그르매

물그르매 번쩍이는 너



-고정희 지음 "고정희 시선집 세트 1"(또하나의 문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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