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문장> 8호(193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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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진정코 최후를 맞이할 세계가 머리 한 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오르는 순간 나는 얼마나 기쁘고 몸이 가벼우리까?" 육사의 수필 '계절의 오행'에 있는 한 구절이다. 조국광복을 위한 의로운 길이라면 언제든지 기꺼이 목숨까지 던지겠다는 결의가 횃불처럼 강열하고 날선 바위처럼 비장하다. 실제 독립투쟁으로 점철된 육사의 삶은 그로 인해 10여 차례 옥고를 치루고 모진 고초를 겪었다. 중국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울에서 검거된 육사는 베이징으로 압송되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헌병의 악랄한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마흔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한 반면 그는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고 일제에 저항하다가 비록 광복된 조국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예언대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 정신의 기저엔 진성 이씨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며 모계로는 의병활동을 주도한 선산 허씨 집안의 가풍을 이어받은 지조와 기개도 한몫 했으리라. 선생의 유해는 고향 안동 원천의 뒷산 낙동강을 바라보며 잠들었으며, 이후 생가 터에 시비 ‘청포도’가 세워졌고 바로 인근에 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다. ‘광야’ ‘절정’과 함께 널리 알려진 ‘청포도’는 육사의 삶과 연관 지어볼 때 일제에 대한 투쟁 의지가 내면화된 작품이란 걸 바로 알 수 있으며, 그 배경을 뛰어넘어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서정적 감동을 충분히 자아내게 한다.
어제 청포도 익어가는 계절, 문학관으로 향하는 길목 도산면 원천리에 이육사 청포도와인 브랜드 ‘청수’의 청포도․생산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청포도는 8월 하순은 되어야 본격적인 수확이 시작된다. 이육사문학관은 은쟁반을 닦고 모시수건을 개키느라 분주한 시기에 이육사시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이육사문학축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국에 많은 문학관이 있지만 이육사문학관만큼 활발하고 내실 있는 문학행사를 하는 문학관도 드물다. 후원회가 잘 가동되고 문학단체와 관민이 손발을 맞춰 협력이 잘 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문학뿐 아니라 독립운동가 이원록에게 주어지는 국가보훈처의 지원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이육사문학축전’은 각각의 문학단체가 개별적으로 개최하던 이육사 문학관련 행사를 안동시를 중심으로 하나로 묶어 2004년 7월부터 통합 시행하고 있다. 행사 가운데 어제(7월29일)부터 오늘(7월30일)까지 1박2일 진행된 ‘이육사여름문학학교’는 ‘선착순’으로 참가 신청한 전국 초·중·고등학생과 일반인 60명이 문인담임과 함께한 일정이었다. 다양한 탐방 및 체험 프로그램과 함께 서정적이고 웅혼한 육사 문학을 몸으로 느끼고 선생의 저항정신을 다시금 새기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문학담임선생님들에게서 글쓰기를 지도받는 시간도 있다. 문인담임으로 송찬호, 주병률, 서안나, 천수호 시인과 황현진 소설가가 참여했다. 어제 시상식에서 안면 있는 서안나 천수호 시인을 만났고 처음 대면한 송찬호 시인을 반갑게 만났다.
송찬호 시인은 팬으로써 평소 존경하는 시인이다. 교류라야 지난번 <튤립>을 비롯해 두어 편 시를 소개한 적이 있고 그전에 그가 문자로 주소를 물어왔고 시집 <분홍나막신>을 부쳐온 게 다였다. 그를 본 첫 느낌은 역시 융숭한 깊이와 더불어 생각보다 더 맑고 선한 인상이었고 겸손했다. 날 먼저 알아본 그를 와락 껴안고 싶었으나 우물쭈물했고 그럴 ‘오버’를 할 처지도 아니었기에 사진이나 한 장 같이 찍자고 했다. 늘 숫기가 부족해 어디 잘 나서지 못하고 먼저 사진 찍자는 일도 좀체 드문 나로서는 파격이라 할 수 있겠다. 배운 대로 실천하는 지행(知行)의 삶을 살다간 육사의 진면목을 마주하는 것처럼, ‘청포를 입고 찾아온’ 그를 만난 것처럼 기뻤고 모처럼 마음이 청포도처럼 싱그럽고 탱글탱글해졌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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