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짧고도 길어야 할/이선영

청포도58 2020. 7. 19. 16:11

짧고도 길어야 할/이선영

 

그대와 나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대와 내가 늘 처음처럼 사랑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마침내 낯익어서 낯설어 버린

서로의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을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대와 내가

거문고의 여러줄 가운데 어긋난 딱 두개줄처럼

끝끝내 묵음으로 울려 왔음을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흙속에 마람속에 뼛가루로 재로

영영 묻어 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은

 

그대 앞에서 내가, 내 앞에서 그대가 늙어가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는 늙어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를 위해서는 짧았으면 싶지만

생활과 핏줄을 위해서는 질기어도 길어야 할

 

당길 수도 늘릴 수도 없는 이

 

인생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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