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스쳐보낸 뒤에야 사랑은/ 복효근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산길에선 정말 믿을 사람 하나 없다
정상이 어디냐 물으면
열이면 열
조그만 가면 된단다
안녕하세요 수인사하지만
이 험한 산길에서 나는 안녕하지 못하다
반갑다 말하면서 이내 스쳐가버리는
산길에선 믿을 사람 없다
징검다리 징검징검 건너뛰어
냇물 건너듯이
이 사람도 아니다 저 사람도
아니다 못 믿겠다 이 사람
저 사람 건중건중 한 나절 건너뛰다보니 산마루 다 왔다
그렇구나, 징검다리 없이
어찌 냇물을 건널 수 있었을까
아, 돌아가 껴안아주고 싶은,
다 멀어져버린 다음에야 그리움으로 남는
다 스쳐보낸 뒤에야 사랑으로 남는
그 사람 또 그 사람......
그들이 내가 도달할 정상이었구나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이 산길에 나 하나를 못 믿겠구나
- 시집 『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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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오르는 길에 쿵쿵 풀쩍풀쩍 사뿐사뿐 뛰며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오는 사람에게 묻는다. 얼마나 남았냐고, 산마루까지 가려면 몇 분이나 더 가야하냐고, 내 턱밑 어디까지 숨이 차올라야 목적지에 당도하겠냐고, 새까만 졸병이 제대를 앞두고 개구리복으로 갈아입은 고참에게 묻는 것처럼 묻는다. 그러나 예비군모 삐딱하게 쓴 채 '삐악삐악 햇병아리 주제에' 모질게 겁주는 선배군인처럼 말하는 선배 등산인은 없다. '국방부 시계 초침에게나 물어봐라' 까칠하게 대꾸하는 사람도 없다.
'조금만 가면 됩니다. '이제 다 왔어요' '힘내세요!' 금자씨 보다 친절하다. 그 친절이 뭐가 어때서 시인은 '믿을 사람 없다고' 삐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곧 깨닫는다. '징검다리 없이 어찌 냇물을 건널 수 있었을까' 그 사람들 다 돌아가 껴안아주고 싶은, '다 멀어져버린 다음에야 그리움으로 남는, 다 스쳐 보낸 뒤에야 사랑으로 남는 그 사람 또 그 사람......' 데면데면했던 그들이 바로 징검다리였으며 도달해야할 정상들이었다고. 평생 눈길 한번 마주치지 못할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이만한 인연도 없으려니.
어느 성질 급한 단체에서는 다음 달 하순에 있는 송년모임 공지를 벌써 문자로 보내왔다. 그러고 보니 올 한해도 80일 남짓 남겨두었다. 서늘한 이 마당에 들어서서야 지나치고 스쳐간 사람들 모두, 무덤덤했던 그들과 나 사이, 별 볼일 없다고 밀쳐두고 심지어 성가신 존재라 여겼던 그 사람들, 그 방문객들. 정현종 시인의 방식으로 말하면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는 ‘실은 어마어마한 일’들, 이제야 그 인연의 갈피를 잡아보는 것이다.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러지 못했다. 언제 한번 내가 먼저 손 내밀어 본 일이 있느냐. 침만 한번 꿀떡 삼키면 내 얼룩으로 그들 상처를 덮을 수도 있었는데. 지구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가려진 달처럼 개기일식 가운데 서로 연민할 수도 있을 것을. 다시 돌아가 그들의 품속으로 파고 들 것을. ‘그들이 내가 도달할 정상’이었는데 ‘다 스쳐 보낸 뒤에야 사랑’이라니. 못 믿을 건 바로 나란 인간이었구나.
권순진
살다보면-권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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