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 속의 함정/ 김상미
갑자기 유년의 뜨락이 그리워져 앨범을 뒤지는 건 함정입니다. 지나간 시간에 새 옷을 입혀 함께 외출하는 것도 함정입니다. 책꽂이에 꽂힌 당신의 시집을 빼내 읽지도 않고 다시 꽂는 것도 함정입니다.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에 마음이 울컥해져 창문을 활짝 여는 것도 함정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실망했다고 말할 때마다 먹은 나이를 게워내는 것도 함정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읽으면서도 모르는 척 침묵하는 것도 함정입니다. 들어줄 귀가 없고, 보아줄 눈이 없고, 품어줄 가슴이 없다면 아무도 사귀지 마십시오. 외로움 때문에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함정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당신의 정신적 고통은 결코 함께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슬픔만을 조금 나눠 가질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많은 걸 요구하는 건 함정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도 함정입니다. 함정인 줄 알면서 그곳에 아낌없이 뇌를 빠뜨리는 것도 함정입니다.
함정들로 가득 찬 당신 머리 속 서재에 앉아 좌절한 펜으로 쓰는 사랑과 미움, 파멸의 서(書) 또한 함정입니다.
그렇게 당신과 나, 우리 모두는 그 꽃잎 위에 앉아 있습니다. 함정 속의 함정! 그외 달리 무엇을 꽃다운 인생이라 부르겠습니까? 천변지이(天變地異)가 모두 그 꽃잎 하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 시집 『잡히지 않는 나비』(천년의시작, 2003)
...................................................................
삶은 숱한 외부와의 갈등이자 딜레마의 연속인데다가 예기치 않은 복병과 부비트랩과의 조우이고 투쟁이다. 낡은 앨범을 들추어보면 분명해진다. 늘 내부와 외부의 부조화로 근본적인 치유의 부재, ‘함정 속의 함정’을 마주하고 겪는다. 뉴스에선 끊임없이 말도 안 되는 소식들을 전하고, 화딱지만 나고 나는 겨자씨 하나 만들어낼 재간도 없는데 정답은 보이지 않는다. 한때는 모든 일에 답이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답이 중요할 뿐 과정은 별 소용없다는 생각도 잠시 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알지 못하기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기에 알지 못한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어림반푼어치도 안되는 것을 정답이라고 나불대고 있지만 그 또한 함정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전에 자기 기만의 깊은 수렁이다. 지식으로부터 기대할 것은 답이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그 무엇뿐. 그래서 나도 마음을 고쳐먹기로 한다. 그것을 방편이라고 불러도 좋고 타협이라 해도 상관없다. 다만 목구멍은 포도청이고, 포도청 앞마당의 해는 매일 아침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만이 명백하다. 한탄할 그 무엇이 고작해야 밥벌이라는 사실은 민망하지만 어쩔 수 없다. 벌이 대신 16년 동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탱자탱자 살았던 집을 반으로 줄이기로 했다.
‘외로움 때문에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함정’이듯이 생계 또한 그러하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당신의 정신적 고통은 결코 함께 하지 않’듯이 빈곤을 나눠가지진 않는다. '겉으로 드러난 슬픔만을 조금 나눠 가질 뿐' ‘그보다 더 많은 걸 요구하는 건 함정이다’ '당신의 마음에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도 함정이다' '함정인 줄 알면서 그곳에 아낌없이 뇌를 빠뜨리는 것도 함정이다'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쓰는 '파멸의 서' 또한 함정이다. '달리 무엇을 꽃다운 인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제 피는 모양대로 피어나면 그만인 것을. '그 꽃잎' 하나면 다인 것을.
권순진
Wild World / John Waite
'문학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부엌의 불빛/ 이준관 (0) | 2015.10.26 |
---|---|
천경자/박경리 (0) | 2015.10.22 |
[스크랩] 풀꽃/ 나태주 (0) | 2015.10.12 |
[스크랩] 시월/ 황동규 (0) | 2015.10.07 |
달물을 마신다/유안진 (0) | 2015.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