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황동규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금(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석등(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
‘시월’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즐거운 편지'와 함께 나이 스물 황동규 시인의 '현대문학' 등단작이다. 손끝으로 썼는지 가슴으로 받아 쓴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가을엔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한다. 이때 시인이란 꼭 시를 쓰지 않더라도 눈동자에 힘을 빼고 하늘의 뭉게구름을 얼마간 바라본다든지 살랑거리는 코스모스나 노란 은행잎, 또는 단풍과 낙엽에 잠깐 사유가 머무는 것으로도 시인의 성정을 갖는다는 뜻일 것이다. 더불어 이 땅에 살다간 혹은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시인들이 남긴 가을의 절창 가운데 한두 편 제목이라도 기억해낼 수 있다면 누군들 이 가을에 시인이 되지 않으랴.
그러는 동안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첫 소절이라도 문득 떠오른다면 우리에게 붙여진 시인의 칭호는 낙장불입된 팔광처럼 빛나리라.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가을을 노래하는 시인이 된다. 물론 한 편의 시로 가을을 속속들이 담아내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빛나는 가을의 시어들이 있기에 가을은 더 아름답고 눈물겨운 계절이다. 살면서 한번쯤 시인의 촉촉한 습성으로 가을을 바라보노라면 하늘은 더 높고 푸르며 산은 보다 싱그럽고 또렷해진다. 꼬리를 물고 뿅뿅 두더지처럼 솟아오르는 어이없고 쓰레기 같은 뉴스들에서 벗어나 오늘은 가까운 산에라도 한번 올라가야겠다. 그 산의 물이 덜 든 단풍잎 하나 쪼르르 달려와 나지막히 속삭이며 추파를 던질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활활 불 한번 질러보는 건 어때요?'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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