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스크랩] 부엌의 불빛/ 이준관

청포도58 2015. 10. 26. 12:41

 

 

부엌의 불빛/ 이준관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의 무릎처럼 따뜻하다.

저녁은 팥죽 한 그릇처럼

조용히 끓고,

접시에 놓인 불빛을

고양이는 다정히 핥는다.

수돗물을 틀면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

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의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꺼지지 않게 한다.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대면

하늘엔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 별이

태어난다.

 

- 시집『부엌의 불빛』(시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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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엌에서 인심 나온다는 말이 있다. 물론 먹는 것에서 인정이 꽃 핀다는 뜻이겠지만, 재래식부엌을 떠올리면 딱히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어머니의 자애로운 정이 녹아 함축된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수탉이 새벽을 알리면 어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둘러쓰시고 밥을 짓기 위해 부엌으로 가신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굴뚝에선 뭉실뭉실 솔가지냄새 피어오르고 밥 짓는 냄새가 뭉클거렸다. 가족 사랑이 가득 담긴 밥과 김장독에서 갓 꺼내어 소담스럽게 담긴 김치, 시라기국 그리고 간장종지가 정성으로 차려지면 그것은 인심을 넘어 천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의 무릎처럼 따뜻한’ 것이다. 시골도 이젠 도시화되어 ‘부엌’은 거의 ‘주방’으로 변해버렸다.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던 부엌이 사라진지 오래며 고양이와 개가, 또 어머니와 아이가 하나의 공간 속에 다정하게 어울렸던 장면도 이제는 보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옛 부엌의 매캐한 연기와 흐린 불빛 속의 어머니를 가슴속에서 복원해보면 주방과 싱크대와 식탁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알싸한 온기 같은 게 느껴진다. 이렇게 현재가 아닌 과거를 끄집어내고 상상력을 발휘해 서정의 공간을 여는 것이 서정시의 본령이다.

 

  금속성 사고와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지배하는 이 시대에 식물적이고 전원적인 상상력으로 인간성 회복을 추구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과 섬세한 시선은 매우 빛나는 시정신이라 하겠다. 단절과 소외로 인한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게 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평안을 얻고자 한다. ‘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오늘의 숙제를 끝낸’ 아이처럼 편안하고, 조용히 끊인 ‘팥죽 한 그릇’처럼 따뜻하고 넉넉해진다. 생의 모든 국면에서 계량적이고 분석적이며 이기적인 가치관이 활개를 칠 때 어머니의 눈물은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으로 온화하게 퍼져간다. ‘접시에 놓인 불빛을 고양이는 다정히 핥’고, 부엌의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대면’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 별이 태어난다’

 

  하지만 살짝 치매기가 찾아온 여든아홉 내 어머니가 켜놓은 부엌의 불빛은 그리 밝진 못하다. 몸과 정신에서 다른 능력은 다 떨구어내고 오로지 밥 짓는 일만 유효한 엄마의 하루는 부엌에서 시작해 부엌에서 마감한다. 그러나 이젠 전기밥솥에 앉혀놓은 밥도 기기조작의 실수로 인해 실패하기 일쑤다. 그땐 가만 계시는 게 도와주는 거라며 늙은 홀아비 아들은 버럭 신경질을 낸다. 그런데도 아랑곳없이 엄마는 자식이 먹을 따슨 밥 한 그릇을 위해 새 밥을 짓고 또 짓는다. 어느땐 점심을 먹고 돌아서 두 시간도 채 안되어 있던 밥 퍼내고 다시 새 밥을 짓는다. 그때마다 부엌에선 희미한 별빛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권순진

 

The Dawn - Des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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