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적 / 윤세영
덜컥 탈이 났다. 유쾌하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가했는데 갑자기 허리가 뻐근했다. 자고 일어나면 낫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웬걸, 아침에는 침대에서 일어나기조차 힘들었다. 그러자 하룻밤 사이에 사소한 일들이 굉장한 일로 바뀌어 버렸다. 세면대에서 허리를 굽혀 세수하기,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거나 양말을 신는 일, 기침을 하는 일,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 내게는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수 없이 병원에 다녀와서 하루를 빈둥거리며 보냈다. 비로소 몸의 소리가 들려왔다. 실은 그동안 목도 결리고, 손목도 아프고, 어깨도 힘들었노라, 눈도 피곤했노라, 몸 구석구석에서 불평을 해댔다.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될 줄 알았던 나의 몸이, 이렇게 기습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줄은 예상조차 못했던 터라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중이다.
이때 중국 속담이 떠올랐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예전에 싱겁게 웃어 넘겼던 그 말이 다시 생각난 건, 반듯하고 짱짱하게 걷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괜한 말이 아니었다. ‘아프기 전과 후’가 이렇게 명확하게 갈라지는 게 몸의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랴! 얼마 전에는 젊은 날에 윗분으로 모셨던 분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몇 년에 걸쳐 점점 건강이 나빠져 이제 그분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깜빡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예민한 감수성과 날카로운 직관력으로 명성을 날리던 분의 그런 모습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한때의 빛나던 재능도 다 소용 없구나,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돌아오면서 지금 저분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혼자서 일어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고, 그런 아주 사소한 일이 아닐까.
다만 그런 소소한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는 대개는 너무 늦은 다음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우리는 하늘을 날고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이루고 싶어 안달하며 무리를 한다. 땅 위를 걷는 것쯤은 당연한 일인 줄 알고 말이다. 사나흘 노인네처럼 파스도 붙여 보고 물리치료도 받아 보니 알겠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크게 걱정하지 말라는 진단이지만 아침에 벌떡 일어나는 일이 감사한 일임을 이번에 또 배웠다. 건강하면 다 가진 것이다.
- 2016년 3월 3일자 동아일보 <윤세영의 따뜻한 동행>
...............................................................
며칠 전 한 지인이 카톡으로 보내온 글이다. 지난번 우울 증세도 있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내 투덜거림을 듣고서 최근 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복사해 보낸 것이다. 고 박완서 선생이 쓴 글이라며 ‘박완서의 老年觀’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이 글에 이어 누군가의 감상문까지 곁들여 전체의 글이 마치 박완서 선생의 글 인양 유통되고 있다. 얼핏 빅완서 선생의 글이라 해도 그냥 속아 넘어갈 만하다. 그런데 아니다. 이 글은 윤세영 작가가 2016년 3월3일자 동아일보에 <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이란 칼럼에 기고한 글이다. 윤 작가는 1956년 충남 아산 출생으로 2010년 <시와 산문>으로 등단한 수필가이며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바 있다.
나도 언젠가 법정 스님의 글이라며 인터넷에 떠도는 것을 그대로 인용했다가 나중 원작자의 항의로 곤란을 겪은 적이 있다. 반대로 거의 날마다 쓰는 내 잡문이 원작자가 지워진 채 인터넷에 유통되다가 다른 이름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더러는 소개된 시인의 자서처럼 돌아다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윤 작가는 친구들이 나서서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해당 블로그나 카페 등에 들어가 사실관계를 알리고 사발통문을 돌리기도 했으나 워낙 광범위하게 퍼진 글은 바로잡기도 쉽지 않을 터이다. 작가는 자신의 글로 인해 본의 아니게 고인의 명예에 손상을 끼칠까도 염려되고 자신으로서도 참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더구나 윤 작가의 글은 "건강하면 다 가진 것이다."로 끝나는데 떠도는 글에는 그 뒤에다 장기 거래가격이라며 우리의 안구가 하나에 얼마이고 심장, 콩팥 등등의 가격표를 낱낱이 열거하면서 이렇게 비싼 몸뚱이니 몸 하나 온전히 지닌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라는 의미를 덧붙여 놓았다. 나도 사실 그 부분에서 이건 박완서 선생의 글이 아님을 직감하고 출처를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윤 작가는 참으로 인터넷 글의 무책임함을 실감한다면서 “누군가 정성을 들여 쓴 글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가져다 살을 붙이고 게다가 저자도 거창하게 돌아가신 분의 성함을 끌어다 댄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이냐며 못마땅해 한다. <일상의 기적> 글의 내용과 더불어 전적으로 공감한다.
권순진
'문학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이선영 (0) | 2019.01.13 |
---|---|
괜찮다, 다 괜찮다/정향 (0) | 2019.01.01 |
십이월/이명옥 (0) | 2018.12.28 |
성탄절을 앞두고/박목월 (0) | 2018.12.24 |
겨울 산/안상학 (0) | 2018.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