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신동호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신동호

 

오전 여덟 시쯤 나는 오락가락한다.

20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3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막둥이를 보며 늘 고민이다.

늘 고민인데 억지로 보내고 만다.

 

정확히 오전 열 시 나는 진보적이다.

보수 언론에 분노하고 아주 가끔 레닌을 떠올린다.

점심을 먹을 무렵 나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배고플 땐 순댓국이, 속 쓰릴 땐 콩나물해장국이 생각난다.

주식 같은 건 해본 일 없으니 체제 반항적인 것도 같은데,

과태료나 세금이 밀리면 걱정이 앞서니 체제 순응적인 것도 같다.

 

오후 두 시쯤 나는 또 오락가락한다.

페이스북에 접속해 통합진보당 후배들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새누리당 의원의 글을 읽으면서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41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2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친구 김주대 시인의 글을 읽으며 킥킥

그 고운 눈매를 떠올리다 보면 진보, 보수 잘 모르겠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그 일도양단이 참 대단하고 신기하다.

주대가 좋아하는 큰 엉덩이에도 진보와 보수가 있을까? 싶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나는 존다.

예전보다는 많이 줄어든, 술 먹자는 전화가 온다.

열 중 아홉은 진보적인 친구들이고 하나는 그냥 친구다.

보수적인 친구가 나에겐 없구나, 생각한다.

 

오후 여덟 시 나는 대부분 나쁜 남자다.

가끔은 세상을 다 바꿔놓을 듯 떠든다.

후배들은 들은 얘길 또 들으면서도 마냥 웃어준다.

집에 갈 시간을 자주 잊는다.

 

오후 열한 시 무렵이 되면 나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다.

어느새 민주주의와 역사적 책무를 잊는다.

번번이 실패하지만 돈을 벌고 싶고, 일탈을 꿈꾼다.

 

자정이 다가오자 세상은 고요하다.

개구리는 진보적으로 울어대고 뻐꾸기는 보수적으로 우짖는다.

뭐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늘 그렇지만 사상보다 삶이 먼저라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진보적일지 몰라, 하면서

대충 잔다.

 

- 시집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실천문학사,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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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진보 성향의 정권이 들어서자 새삼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개념 논의가 지펴지는가 하면 일부 보수층에서는 막연한 불안감마저 감추지 않고 있다. 진보를 좌파로, 보수를 우파로 규정짓기도 하는데, 프랑스혁명 때 열렸던 국민의회에서 왼쪽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프랑스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공화파가, 오른쪽엔 예전 왕정체제의 근간을 유지하려는 귀족 중심의 왕당파가 앉았던 데서 유래되었다. 이후 국민공회에서도 왼쪽에 노동자, 농민, 빈민을 대변하는 자코뱅파가 앉고, 오른쪽에 상공업자와 부자들을 대변하는 지롱드파가 앉았다.

  즉, 보수는 기득권층을 대변하고 기존의 가치를 지키면서 사회질서를 중시하며 역사적 정통성에 기반을 두고 성장 발전하는, 우리의 과거사에서 산업화 세력을 일컫는다. 반면 진보는 소외계층을 대변하며 분배와 노동권을 중시하고 개인의 자유와 변화를 외치며 발전을 꽤하는, 이를테면 민주화 세력을 일컫는다. 시장경제를 신봉하면서도 그들은 다른 의견이다. 보수는 대체로 시장경제 개입을 반대하는데, 진보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으면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중산층이 무너진다며 얼마간 시장경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모든 것을 시장의 원리에 맡기면 개인 각자가 자유롭게 부를 얻고자 열심히 경쟁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평등은 자연의 법칙이며, 오히려 욕구를 자극해 사회발전에 도움이 되고 국가도 함께 부유해진다는 생각으로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그 원칙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장경제에 마냥 맡겨둬 버리면 자칫 승자독식의 우려가 있다. 압구정동에서 홍준표 후보에 대한 몰표 현상도 그들의 욕구가 표출된 결과라 이해할 수 있겠다. 농촌지역의 홍 지지자와는 달리 그들에겐 분명한 이유와 맥락이 있긴 있었다.

  또 다른 명분이 있다. 포은 정몽주는 왕이 썩고 탐관오리가 판쳐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 입장인 반면에, 심상정 후보가 역사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삼봉 정도전은 왕이 썩고 탐관오리가 판치면 나라를 바꿔야 한다는 진보적 입장이었다. 전자는 나라가 우선이고 후자는 백성이 먼저다. 문재인의 선거캠페인 가운데 하나인 "사람이 먼저다"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제 보수와 진보의 구별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다. 국민의 이해가 양분될 수 없고, 결국 좋은 세상 만들어서 살자는 것에는 둘 다 맥을 같이 한다.

 

  서로 대립하는 듯 보여도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억지 구분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에서처럼 어느 순간엔 진보적이었다가 또 어느 땐 보수적이 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오락가락 할 경우도 있다. 이번 선거처럼 ‘41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2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진보적 가치를 배제하는 보수나, 보수적 가치를 깡그리 무시하는 진보는 곤란하다. 개혁하지 않는 보수도 의미가 없다. 다만 이제 그 지긋지긋한 좌파, 좌익은 종북 빨갱이라는 등식은 폐기되어야한다. 그 프레임은 과거 정권이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쪽으로 몰아 탄압했던 수단이 아니던가.

 

  남북 화해, 복지 확대, 민주화 등의 기치가 우리 삶을 핍박할 리는 없지 않은가. 자유한국당이 ‘목숨을 걸고’ 반대할 건 하겠다는 결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건전한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과거와 미래, 세대와 계층, 지역 간 완전한 결별과 적대는 원치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잘 반영해줄 정부와 정당이다. 썩어빠진 보수 말고 건전한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면서 서로 인정하고 서로를 보완하며 견제하고 균형을 이룰 때 민주주의는 발전하고 인간의 행복과 존엄은 실현된다고 믿는다.

권순진

 

Caravan - Detlef Schwerter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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