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스크랩] 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청포도58 2015. 12. 21. 14:37

 

 

 

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버릴까 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해버릴까 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 사류로

오염될까 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 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 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라고

 

- 시집『봄비 한 주머니』(창작과 비평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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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한다'는 말의 값어치를 곰곰 따져보면 도무지 쉽게 뱉어낼 수 없다고 한다. 헤프게 보일까봐 아끼고 참아내고 싶은 말이라고 했다. 흔히 그 달콤한 말은 백번 천번 들어도 좋다고들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너무 익숙하게 남발하여 말의 값이 평가절하된 세상에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 원인을 시대의 가벼움, 젊은이의 경박 탓으로 돌릴 것만도 아니라고 본다. 생각해보면 진실 되고 고귀한 사랑이 그만큼 귀해진 탓이거나, 도처에 사랑에 목마른 사람이 널려 있어 내남없이 외롭고 쓸쓸하다는 반증일는지도 모르겠다.

 

 그 수요가 많다보니 소품종 소량 생산으로 은밀하게 유통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고 현주소가 아닐까. 이성간 매력에 이끌려 강력하고 육체적인 자극을 원하는 감정이 남녀간 좁은 의미의 사랑이라 한다면, 언젠가 마광수 교수가 말했던 ‘관능적 경탄’으로부터 사랑의 시동이 걸린다는 주장에 일정부분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겠다. 하지만 그런 상대를 만나 덜컥 첫눈에 반했다고 해서 곧장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랑의 선행조건 단계인 끌리는 감정만으로 망설임 없이 ‘사랑’을 주고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덮어놓고 사랑을 들이대는 사람을 종종 본다. 재바른 고백의 절차상의 흠결도 흠결이지만 숙성을 거치지 않은 사랑은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을 뿐 아니라 피차 소망스럽지 않은 곤란한 상황을 초래할 개연성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단숨에 사랑의 계단을 다 뛰어 올라 단 하루에 초고속 성장을 이룩한 ‘운명적’사랑이 없으란 법은 없다. 소설과 영화에서 곧잘 만나는 그런 사랑을 한번쯤 동경하며 설레기도 하는 것인데, 단박에 망설임 없이 함몰되는 사랑도 가능한 게 사랑의 다른 모습임을 어쩌랴.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사랑은 '특수성'을 띄어야 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자기만의 심장에 고이 모셔진 ‘뜨거운 말씀의 사리’여야만 한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감정의 차이는 무얼까.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감정엔 책임이란 게 없지만 사랑에는 책임이 따른다. 서로 좋아하는 것은 그냥 싫어지면 그걸로 그만이지만 사랑은 싫어지는 것으로 간단히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픔과 상처가 남는 법이며, 쉬 뱉어낸 무책임한 그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유린된 사랑도 셀 수없이 많은 것이다.

 

 반면, 반드시 말해야할 때 하지 못하고 꼭 듣고 싶을 때 듣지 못한 비대칭으로 인해 평생을 회한과 추억 안에서만 맴돌고 묻혀버린 사랑도 허다하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간담 서늘한 선고에 고개 떨어뜨리는 사람도 있다. 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영원히 가슴속에 유배된 사랑도 있긴 있는 것이다.

 

 

권순진

 

사랑한다는 말 - 김동률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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