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스크랩] 동사서독/ 오정국

청포도58 2015. 4. 1. 16:01

 

 

 

동사서독/ 오정국

 


무사는 여자를 잊기 위해 사막으로 갔다

사막에는 되돌아 나오는 길이 없었다

비가 내려도 하늘이 밝았다

무사는 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무림에 두고 온 그의 여자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무사는 사막에 여인숙을 차려놓고 평생 그렇게 혼자 살았다

사막의 빛이 너무 밝아 눈이 멀어가는 떠돌이 검객이 있었다

그의 길은 사막에서 숲으로 열렸다 닫혔다 했다

구릉 너머 마적 떼가 쳐들어오고, 떠돌이 검객은 멀어가는 눈으로

수백 명의 마적을 물리치고 또 물리쳤다

저수지는 고요했다. 개들조차 오지 않았다

저수지엔 꽃이 피지 않았다

아내의 불륜을 용서 못해 고향을 떠난 떠돌이 검객은

칼을 맞아 죽어가면서 고향의 복사꽃을 그리워했다


- 시집『모래무덤』(세계사,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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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양봉(장국영)은 무림의 고수가 되기 위해 사랑하는 여인(장만옥)을 남겨두고 고향을 떠난다. 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을 기다릴 것이라고 믿었던 여인은 이미 그의 형과 결혼한 뒤였고, 구양봉은 옛사랑을 가슴에 묻고 사막에서 여관을 하며 해결사로 살아간다. 구양봉에겐 황약사(양가휘)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사랑에 관한 슬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는 한때 가장 친했던 친구의 부인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도화림을 떠났다. 매년 복사꽃 피는 시절이면 구양봉을 찾아 술추렴을 하곤 했다. 그리고는 구양봉이 사랑했던 여인이 있는 곳으로 함께 떠난다. 10살 난 아들을 둔 그녀도 아직 구양봉을 사랑하고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황약사 역시 사실은 그녀를 짝사랑하는데, 이 영화에서 東邪는 바로 황약사(양가휘)를 칭하고 西毒은 구양봉(장국영)을 말한다. 

 

 이후 얼키설키 복수와 배신의 드라마는 저리고 느릿하게 전개된다. 도화림 출신의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쇠락한 검객은 눈이 완전히 멀기 전 복사꽃 피는 고향에 돌아갈 여비를 위해 살인청부를 자청하기도 하고 달걀 한 개를 대가로 어린소녀의 복수를 대신하다가 손가락 하나를 잃기도 한다. 이렇게 가슴에 나름의 상처를 지닌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세월은 흘러가고 마침내 구양봉은 형수(옛 애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여관에 불을 지르고 떠난다. 취생몽사만 남겨둔 채 떠났는데, 이 '취생몽사'란 술을 마시면 모든 번뇌를 잊는다는 의미다. 모든 사랑은 다 번뇌인가? 한 커플의 남녀 간 열정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수많은 인간들에 의해 패착을 둔 사랑의 궤적이 영화 동사서독의 번뇌이며 핵심이다.

 

 A는 B를 사랑하고 B는 A를 사랑할 수 없다. B를 짝사랑하는 C는 D를 사랑하게 되고 그 때문에 E는 실연한다. F는 C의 사랑을 받을 수 없어 저 홀로 저주하고 저 홀로 자기연민에 빠진다. G는 A에게서 B의 그림자를 보게 되고 E에게 D의 그림자를 본다. F는 A를 C로 생각하고 A는 F를 B로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의 영어제목이 'Ashes of Time'이다. 이들은 마치 잿더미처럼 허망한 시간들 속에 각자 상처를 하나씩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 복잡한 양상으로 전재되는 <동사서독>은 흘러가는 시간과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친구의 배신 등 삶의 보편적인 일상들을 '왕가위식 언어'로 포스트모던하게 그려내어 무협물의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데 성공한 영화다. 

 

 오래전 보았던 인상 깊은 영화를 오정국 시인의 시로 인해 비디오로 다시 만났다. 그리고 시인은 지난 해 은퇴 선언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을 슬쩍 배경 속에 끼워넣었다. 한 번 보아서는 줄거리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영화 ‘동사서독’ 그러나 두 번 세 번 볼 때 비로소 이 영화는 왕가위의 가장 야심작임을 느낄 수 있다. 왕가위는 말한다. 이 영화는 육안으로 보지 말고 마음의 눈으로 보라고. 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다. 시인은 그런 쉽지 않은 마음의 눈으로 영화를 보았던 것 같다. 그는 동사서독에서 내밀한 전설이 흐르는 고향의 복사꽃을 보았다. 그리고 ‘저수지는 고요했다. 개들조차 오지 않았다’ 그러나 고향의 복사꽃은 다시 필 것이다. 중년의 사랑처럼 조금은 낡아보이지만 여전히 열정적인 꽃이 복사꽃이다.  

 

 쉼보르스카(96년 노벨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의 ‘사진첩’ 이란 시의 첫 구절은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로 시작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서 가족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이 한 명쯤 있어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후룩 흡입된 복사꽃 향기와 함께 12년 전 4월1일 거짓말처럼 스스로 세상을 버렸던 무사 장국영의 눈빛도 찬찬히 추억해 본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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