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정미소처럼 늙어라/유강희

청포도58 2021. 5. 30. 12:07

정미소처럼 늙어라/유강희

 

나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직은 늙음을 사랑할 순 없지만 언젠가 사랑하게 되리

하루하루가 다소곳하게 조금은 수줍은 영혼으로 늙기를 바라네

어느 날 쭈글쭈글한 주름 찾아오면 높은 산에 올라 채취한 나물처럼

그 속에 한없는 겸손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하늘의 열매 같은 그런 따사로운 빛이 내 파리한

손바닥 한 귀퉁이에도 아주 조금은 남아 있길 바라네

언젠가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다 잠깐 들어가 본

오래된 정미소처럼 그렇게 늙어 가길 바라네

그 많은 곡식의 알갱이들 밥으로 고스란히 들려 주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식은 왕겨 몇 줌만으로 소리 없이 늙어 가는

그러고도 한 번도 진실로 후회해 본 적 없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도 반짝, 들려주는 녹슨 양철지붕을

먼 산봉우리인 양 머리에 인 채 늙어 가는 시골 정미소처럼

나 또한 그렇게 잊힌 듯 안 잊은 듯 조용히 늙어가길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