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근성(根性)/조정권

청포도58 2020. 4. 23. 14:25



근성(根性)/조정권


배추를 뽑아 보면서 안쓰럽게 버티다가

뽑혀져 나온 뿌리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뿌리들이 여지껏 흙 속에서 악착스럽게 힘을 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뿌리는 결국 제 몸통을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배추를 뽑아보면서 이렇게 많은 배추들이 제각기

제 뿌리를 데리고 나옴을 볼 때

뿌리들이 모두 떠난 흙의 숙연(肅然)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배추는 뽑히더라도 뿌리는 악착스러우리만큼 흙의 혈(血)을 물고 나온다

부러지거나 끓어진 배추 뿌리에 묻어 있는 피

이놈들은 어둠 속에서도 흙의 육(肉)을 물어뜯고 있었나보다

이놈들은 흙 속에서 버티다가 버티다가

독하게 제 하반신(下半身)을 잘라 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뽑혀지는 것은 절대로 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뽑혀지더라도 흙 속에는 아직도 뽑혀지지 않은

그 무엇이 악착스럽게 붙어 있다

흙의 육(肉)을 이빨로 물어뜯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