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시래기 한 움큼 / 공광규
시래기 한 움큼 / 공광규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식당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 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주먹다짐 한 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미운 인심에게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넘겨져 조서를 받던 그는
찬 유치장 바닥에 뒹굴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 시집『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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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장날을 골라 찾아다니면서 부러 사람 다니는 길바닥까지 잔뜩 옹기를 부려놓고선 먹잇감을 기다리는 떡대 좋은 옹기장수가 있었다. 막걸리 몇 잔에 갈지자걸음을 걷는 ‘호구’가 나타나면 옴팡 뒤집어씌우는 수법으로 매상을 올린다. 하지만 옛 시골인정이 그리워 ‘시래기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빈’걸로다가 이렇게나 곤욕을 치러야 하는 상황은 많이 심했다. 하긴 요즘은 서리에 비교적 관대했던 예전과 달리 시골 인심도 많이 사나워졌다. 옛 추억이 생각나서 잠시 남의 밭에 잘 못 눈을 돌렸다가는 절도죄로 호되게 걸려들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경우는 삭막한 도시의 야박한 인심 정도가 아니라 칼만 안 들었지 완전 날강도 심보 아닌가. 설마 이런 인간이 있을까 의아해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도시 농촌 가릴 것 없이 비슷한 사례가 버젓이 횡횡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테면 범퍼가 약간 긁힌 경미한 접촉사고에도 옳거니 잘 걸렸다 한몫 챙기고자 뒷목잡고 드러눕는 얍삽한 교통사고 환자가 어디 한둘인가. 나도 오래 전 정차상태에서 차선변경을 하다가 앞차와 가볍게 키스한 정도였는데 뒷목을 잡는 운전자 부부 덕분에 두 사람 치료비에 합의금까지 제법 큰 보험금이 빠져나간 사실을 나중에 알고서 황당해했던 기억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사기를 당한 것이다. 다만 고의적이고 사전 계획적인 ‘경성 사기’에 비해 돌발적인 사고 후 피해를 과장해 이익을 취했기 때문에 ‘연성사기’가 된다. 오히려 옹기장사의 경우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사전 계획적이라 경성사기의 혐의가 짙다. 만약 단순한 행인의 실수로 옹기가 깨졌을 때 그 배상액을 과하게 부풀려 받았다면 연성사기가 되는 것이다. 법을 집행하는 기관도 예외는 아니다. 언젠가 절도혐의로 구속된 자에게 경찰이 무려 171건의 미제 절도사건을 덮어씌운 이른바 '업어 보내기'를 하다 들통 난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일만을 떠올리면 우리사회가 이토록 비루하고 참담하게 뒤틀린 세상인가 싶어 어질어질해진다. 요즘은 시래기가 뭔지 모르거나 ‘시래기’를 ‘쓰레기’와 동의어로 아는 아이도 있다. 시래기 한 움큼에 코 부빈 죄의 근원은 그로 인해 촉발된 고향생각이었고 구수한 옛 인정의 그리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도적질이 될 수도 있는 세상이니 그 좋았던 인심도 다 도둑맞았나 보다. 식당주인의 몰인정에도 부아가 치밀지만 더욱 화가 난 것은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 때문이다. 정말 다 때려치우고 ‘자연인’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땐 ‘개새끼야!’보다 한층 센 욕을 세상 향해 퍼붓고 싶어진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