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스크랩] 결혼에 대하여/ 정호승

청포도58 2017. 4. 19. 11:06




결혼에 대하여/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깎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 시집『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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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의 말씀들을 가슴깊이 새겨 결혼을 준비하고 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게도 나는 이 시가 발표되기 거의 20년 전, 아버지의 재촉에 그리고 당시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하는 걸 보고 에라 모르겠다며 아무런 개념도 대책도 없이 후다닥 결혼이란 걸 해버렸다. 그렇게 한 결혼이 요행히 탱자탱자 탈 없이 살면 다행이겠는데 그러질 못했다. 사람의 기본 성격이나 품성, 인생관이나 가치관은 결혼 전에 이미 결정된다는 것을 간과했다. 네모를 동그랗게 만드느라고 십여 년을 허우적거렸다. 이 시에 적힌 많은 항목들이 실은 나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감성들이지만, 그 중에 몇 가지 이를테면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을 처음부터 만나서 살았어야했는데 나는 현명하지 못했다.


 결혼은 인류의 존속을 희망하고 디자인한 신의 뜻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 물론 우주적 의미지만 나는 순종을 넘어 너무나 쉽게 페이지를 후딱후딱 넘기고서 서둘러 굴종해버렸다. 내 인생을 책임져야할 사람은 둘레의 친구나 아버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임을 깊이 성찰하지 않았다. 군대 다녀와서 직장을 얻고 나니 남자 26, 여자 23세가 되면 호주의 승낙 없이도 결혼할 수 있다'는 민법의 조항을 적령기이고 권고사항인줄로 이해했다.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여, 그 사람과 50년 동안 숲길을 산책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런 내게 몇 해 전 한 친구가 대뜸 자기 아들 결혼식의 주례를 서달라는 청탁을 해왔다. 그 친구 말인즉슨 여태껏 자기가 참석한 결혼식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주례사를 한 분이 작가 김홍신 이었다면서 나도 명색이 작가이니 못할 것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에이 내가 무슨 자격으로극구 사양했건만, 옆에서 다른 친구가 부추기는 통에 그럼 재미로 한번 해보지 뭐라며 농담처럼 승낙을 했다. 형편이 어려운 친구도 아니고 찾으려면 얼마든지 가까이에서도 명망 높고 경험 많은 분을 모실 수 있음에도, 또한 주례만 봐도 양가 집안의 품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고 하는데 여간 걱정되는 일이 아니었다. 요즘 주례사는 5분 정도면 족하다고는 하지만 면허증도 없는 무면허 주례인지라 실수는 하지 않을까 부담이 컸다.


 그 태산 같은 걱정을 안고 나는 이 시에서처럼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인지를 먼저 두 사람에게 물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들 합니다, 눈으로 사랑과 믿음과 존경을 담아서 천천히 경례맞절을 시키고 혼인서약과 성혼선언문 낭독까지 별 무리 없이 마쳤으니 원만하게 결혼은 성립된 셈인데 문제는 역시 주례사였다.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기에, 그럴 때를 대비해 반면교사의 경험으로 뭔가 해줄 말이 있을 것도 같았다. 짧을수록 좋다고는 하나 백범 선생 흉내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역대 가장 짧은 주례사를 한 분이 백범 김구 선생이라고 한다.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후배의 아들 결혼식에서 너를 보니 네 아비 생각이 난다. 부디 잘 살아라누군가 시간을 재어보니 딱 5초가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아비가 멀쩡하고 건재하므로 대신 수월하게 5분 정도 때울 요량으로 시 한 편을 미리 프린트하여 준비했다. 분위기가 먹힐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방법이 그래도 실수가 적겠다 싶은 통박이 작용했던 것이다.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한 앤드류 매투스의 말을 응용하여 결혼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이상형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기왕 선택한 배필을 긍정하고 좋아함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나로서는 뒤늦게 깨달은 바를 말해주고선 준비한 아파치인디언의 결혼축시를 후딱 읽는 것으로 주례사를 마쳤다.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로 시작하여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마치 진짜 시인처럼, 인디언 추장처럼 주문을 외쳤다.



권순진


서곡(Overture)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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