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경청(傾聽)/ 정현종
경청(傾聽)/ 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 2004년 제12회 공초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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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이건희 씨가 선대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휘호가 이 ‘경청(傾聽)’이다. 그는 실제로 말을 아꼈으며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하는 습관을 몸으로 익혔다. 이 경청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 다양한 고급 정보들을 얻었고, 그 정보는 삼성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또한 이러한 경영 마인드는 그룹 전체에 영향을 끼쳐 삼성의 정보력은 국가 정보기관보다 정확하고 막강하다는 말도 나왔던 것이다.
보다 소중한 경청의 효과는 확고한 리더십이다. ‘리더십은 웅변보다 경청에서 나온다.’는 신념이 경영교훈이 되었다. '귀 기울여 들으면(以聽)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得心).'는 게 선대 회장의 가르침이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삼성이 국내 최대기업이고 대외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브랜드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한 요인이 이 ‘경청’이다. 하지만 삼성의 부정정적인 면을 꼽자면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할 정도다. 삼성은 그동안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들어왔고 듣기 싫은 비판은 철저히 무시하고 차단해왔다. 마치 박근혜가 그랬던 것처럼.
‘만약 그대가 경청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그대는 명상의 가장 심오한 비밀을 배운 것이다’라고 오쇼 라즈니쉬는 말했다. 경청은 명상의 해독뿐 아니라 세상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서편제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뛰어난 소리꾼을 만들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하는 대목이다. 눈의 감각을 차단시켜 귀로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그래서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다'라는 말은 설득력을 갖는다.
현대는 온갖 말과 정보의 홍수 속에 있다. 통째로 먹혀들지 않으니 자꾸만 귀는 먹먹해져간다. 그렇게 귀가 멀다보니 자기주장과 주의만 있고 남의 소리는 귀를 기울일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걸 다 들어야 경청을 잘하는 건 물론 아니다. 분별력을 갖추지 못할 때 이들은 단지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 분별력은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자기 안의 탐욕 때문에 수많은 비판과 경고가 귀에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남의 말은 아랑곳없이 제 말만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람들로 가득 찬 모습일 것이다.
시끌시끌한 술자리에서도, 정치판에서도 도통 남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들어주는 것은 그 자체가 존중이고 사랑이다. 상대의 말은 듣는 시늉도 않고 조금의 틈만 생기면 말을 자르고 비집고 들어와서 자신의 목청만 높인다. 경청을 하자면 겸손이 먼저여야 하는데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노릇이긴 하다. 말을 좀 떠듬거릴지언정 상대에게서 겸손과 경청의 태도가 읽혀질 때 불행과 비극, 불신과 파국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지체가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요구되는 덕목이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해가지고서는 결코 진정한 일류가 될 수 없다.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모르면 세상은 한 걸음도 더 나아가기 어렵다. 사랑과 영혼의 귀를 열어 자신의 귀 바깥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피우기는 지난한 일이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