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기원도 없이 쓸쓸하다/박정대

청포도58 2016. 8. 10. 11:48

 

기원도 없이 쓸쓸하다/박정대

 

나의 쓸슬함엔 기원이 없다

너의 얼굴을 만지면 손에 하나 가득 가을이 만져지다 부서진다

쉽게 만져지는 사랑을 생이라고 부를 수 없어

나는 사랑보다 먼저 생보다 먼저 쓸쓸해진다

적막한, 적막해서

아득한 시간을 밟고 가는 너의 가녀린 그림자를 본다

네 그림자 속에는 어두워져 가는 내 저녁의 생각이 담겨 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끝내사랑할 수가 없어

네 생각 속으로 함박눈이 내릴 때

나는 생의 안쪽에서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만 볼 뿐

네 생각 속에서 어두워져 가는 내 저녁의 생각 속에는 사랑이 없다

그리하여 나의 쓸쓸함엔 아무런 기원이 없다

기원도 없이 쓸쓸하다

기원이 없어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