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스크랩] 11월의 붉은 기도 / 권순진
청포도58
2015. 11. 11. 12:23
11월의 붉은 기도 / 권순진
태풍은 비켜가고 격랑은 멈췄습니다.
저마다의 소출로 셈을 마치고 전은 둘둘 말렸습니다.
몇은 지전을 세기 위해 손가락에 침을 바르는데
나는 줄 그으진 빈 종이만 만지작거립니다
그럼에도 그대의 은총에 무릎을 꿇습니다
한 해의 끄트머리 한 발 앞에서야
퍼득이지 않아도 될 많은 근심의 날개쭉지들
조바심으로 서성거리고 동동거렸음을
고백하며 부끄러이 여깁니다.
새 달력을 걸고 새해를 받아들었을 때
시작과 끝이 한결같기를 기도했건만
밭고랑의 물은 비쩍비쩍 말라 가고
노을은 파다하게 번지고 있습니다
가지 끝의 열매 몇, 붉게 물들기는 이제 걸렀나 봅니다.
다시 시간의 유령 앞에 섭니다
마음은 급했으나 질질 끌려 다닌 시간들
주먹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간 뒤끝입니다
마른 이파리 떨어져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쇠잔한 시간의 소리를 쓸쓸히 듣습니다.
다시 안간 힘 다하여 무릎의 관절을 세웁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무늘보의 미련한 몸짓으로
두레박을 내려 물 한 동이 길어 올립니다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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