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스크랩] 유월(六月) / 김달진

청포도58 2015. 6. 23. 09:35

 

 

유월(六月) / 김달진

 


고요한 이웃집의

하얗게 빛나는 빈 뜰에 우에

작은 벗나무 그늘 아래

외론 암탉 한 마리 백화(白花)와 함께 조을고 있는 것

판자 너머로 가만히 엿보인다.


빨간 촉규화(蜀葵花) 낮에 지친 울타리에

빨래 두세 조각 시름없이 널어두고 시름없이 서 있다가

그저 호젓이

도로 들어가는 젊은 시악시 있다.


깊은 숲 속에서 나오니

유월(六月) 햇빛이 밝다

열무꽃밭 한 귀에 눈부시며 섰다가

열무꽃과 함께 흔들리우다.

 

- 시선집『올빼미의 노래』(시인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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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정적인 한국화로 그려진 한 폭 유월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서 마치 나 자신이 ‘열무꽃과 함께 흔들리는’듯한 느낌을 준다. 여름이 제철인 십자화과의 채소 열무는 무보다는 잎을 식용하는데 주로 김치를 담아먹는다. 보리밥에 열무김치는 6월을 대표하는 음식이라 하겠다. 영어 이름인 ‘young radish’가 ‘어린 무’란 뜻이듯 ‘열무’는 ‘어린 무’ ‘여린 무’에서 비롯된 말이다. 여기 동원된 시어들은 열무꽃처럼 모두 나지막하고 조용하여 그 내밀한 서정을 자잘하게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번잡스런 세상으로부터 비켜나 모든 시름 다 잊고 오로지 유월의 햇빛 속에서 자연과 조응하는 모습이다.

 

 고향 진해의 김달진 시비에 새겨진 시인 동시에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열무꽃>에서도 그리운 고향의 정경과 함께 인간과 자연이 평등하게 어울려 사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가끔 바람이 오면/ 뒤울안 열무 꽃밭 위에는/ 나비들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가난한 가족들은/ 베적삼에 땀을 씻으며/ 보리밥에 쑥갓쌈을 싸고 있었다./ 떨어지는 훼나무 꽃향기에 취해/ 늙은 암소는/ 긴 날을 졸리고 졸리고 있었다.’ 시 <샘물>에서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았다’란 구절도 있다.

 

 이렇듯 김달진의 시는 욕심 없이 자연을 바라보거나 불교의 가르침을 깊이 사유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후반기 김달진 시의 특징은 선(禪)으로 시를 짜고, 시로서 선을 여는 고고한 정신주의에 입각해 있다. 한학자이기도 한 그의 남겨진 많은 저술과 결코 가벼이 평가할 수 없는 시 세계이지만 생전의 시인과 그의 시는 일반에게 그다지 큰 반향과 조명을 받진 못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제정되어 올해 26회째인 ‘김달진 문학상’은 국내 최고 수준의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 되어있다.

 

 문학상의 위상은 내건 이름보다는 심사위원과 역대 수상자의 면모, 주최 측의 권위, 상금과 전통 등이 고루 감안되어 심증 평가된다. 며칠 전 발표된 26회 김달진 문학상은 시 부문의 정현종, 평론 부문의 김재홍이 각각 수상자로 선정되어 9월에 있을 ‘김달진 문학제’에서 그 시상식이 있을 예정이다. 시와 평론 두 부문 공히 문단경력 10년이 넘는 작가의 최근 1년간 발간된 작품을 심사대상으로 한다. 역대 수상자의 면모를 살펴보면 모두 받을만한 분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정현종 시인은 많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이건청 시인은 “정 시인은 유구한 시의 정통을 이어받아 궁벽한 고독 속으로 침잠해 시를 건져내오는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고 했다. 정현종 시인은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세상일과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되고, 그리하여 생각과 감정이 균형과 조화를 향해 움직이며 따라서 정신은 넓어지고 깊어진다”며 “나는 꽤 오랫동안 시를 쓰고 산문도 썼는데, 그게 얼마나 공부가 됐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수상소감을 밝혔다. 이는 곧 김달진의 문학정신과 문학상 제정 취지를 함축한 말이면서, 내가 시를 읽고 어설픈 단상을 적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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