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스크랩] 첫사랑/ 류시화

청포도58 2015. 2. 26. 10:21

 

 

첫사랑/ 류시화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 시집『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열림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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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이 있다. 그땐 너무 어렸거나 어리석었고 처음이기에 서툴렀지만 소중한 시간들. 그렇게 첫사랑은 스쳐지나가고 만다. 먼 훗날 문득 그 풋풋한 시간들을 추억하면 가슴이 짠해오고 콧등이 시큰해진다. 그 첫사랑이 누구는 아쉬움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여전한 설렘으로 다가온다. 영화「건축학 개론」의 에필로그에는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고 말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추억은 각기 다른 시간 속에서 진행된 개별적인 산물이다. 나에겐 그때 그 사람이 소중한 첫 사랑이었지만 상대는 도무지 아닌 비대칭일 수도 있다. 아니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과 처음이 만나 서로가 서로의 가슴에 신화로 남을 첫사랑이란 얼마나 가슴 떨리는지, 아름다운지.

 

 내게도 그런 첫사랑이 있었다. 긴 생머리, 까무잡잡한 피부, 웃을 때 콧잔등에 잡히는 잔주름, 상냥한 말투, 작은 탁자에 온기를 담은 찻잔 두 개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리란 무욕의 가치관. 그녀도 그랬다.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힌 상처’라며 가끔 생머리를 걷어 올려 내게 이마를 보여주었다.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난 투덜대곤 했다. 나는 서울에서 직장을 가졌고 그녀는 부산의 한 여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서양속담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때로는 그것으로 내 방종을 위장했으며 그녀를 쓸데없이 긴장시키곤 했다. 그 긴장은 꽤 길게 갔지만 결국 사랑은 이완되어 시무룩해져갔다. 전적으로 부박하고 허접한 내 탓이었다.

 

 ‘옛 수첩에’ 적힌 이름을 슬며시 꺼내볼 때도 있으나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안다. 한번은 그녀의 이름을 인터넷 검색창에 쳐 넣어보기도 했다. 흐릿한 흔적 하나를 발견했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녀도 가끔 속절없이 유치하게 나를 꺼내어볼까. 내 이름을 네모 칸에 넣고 엔터키를 툭 쳐본 적이 있었을까. 잠시 생각했을 뿐 사람도 시간도 내 의식 안에서 병치되진 않았다. 건축학개론에서 납득이가 승민에게 말했다. ‘첫사랑이 잘 안되니까 첫사랑이지, 잘 되면 그게 마지막 사랑이지 첫사랑이냐?’ 첫사랑은 실패로 끝나기에 더 애틋하다지만 이젠 무의식에서조차 빛바랜 긴 세월. 투사된 옛사랑의 그림자는 착시인양 가물거리기만 한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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