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단 하나의 천수천안/ 이원규
단 하나의 천수천안/ 이원규
저 산은 그 어떤 꽃들도 마다하지 않는다
독초도 고슴도치도
멧돼지도 말벌도 살모사도
저 강물은 절대로 분별하지 않는다
천 개의 손, 천 개의 눈을 가졌기 때문
깊은 계곡 물소리 들으며
얼레지가 쫑긋 연분홍 귀를 내밀고 있다
그 순간 저 가녀린 꽃처녀는
마치 치마를 뒤집어쓰듯 온몸 통째로 귀가 된다
봄비가 오시면 온몸이 입이자 혀가 되고
깊푸른 물속의 하늘을 볼 때는 눈동자
누군가 살며시 입산하면 꽃송이 통째로 코를 벌름거린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었다
밤길을 도와 우물가 앵두나무로 다가오면
그녀의 발자국 소리에 온몸 통째의 귀가 되고
밤바람 불면 단 하나의 솜털로 파르르
첫 키스 때는 겨우 혀만 살아 있었다
시시로 그녀네 울타리의 나팔꽃처럼 킁킁 기웃거리는 코가 되고
잠시라도 안 보이는 날이면
당산나무 밤 그늘을 떠도는 반딧불이 눈동자
온몸 단 하나의 손
온몸 단 하나의 귀일 때
비로소 천 개의 코가 되고 눈이 되고 혀가 된다는 것을
아예 몰랐다는 듯이 까맣게 잊고 살았다
- 계간《주변인과문학》창간호(2013)
........................................................
봄부터 시작해서 한겨울까지 이 땅에서 피고 지는 들꽃만도 4천여 종이나 된다. ‘바다’라는 낱말이 모든 걸 다 ‘받아’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 문학적 재해석이 일찌감치 있었듯 산과 들과 강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꽃들도 마다하지 않’으며, ‘절대로 분별하지 않는다.’ ‘천개의 손 천개의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리산은 넓은 품을 가진 어머니의 산이 아닌가. 시인도 말했듯이 ‘유정, 무정의 생명체들이 깃들어 살기에 가장 크고 높고 깊은 산’이 바로 지리산인 것이다. 그곳에 봄비라도 올라치면 가녀린 꽃처녀 ‘얼레지’는 온몸이 입이 되어 혀를 내밀고, ‘누군가 살며시 입산하면 꽃송이 통째로 코를 벌름거린다.’
시시때때로 그 상황의 필요에 의해 부위가 확장되어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입이 되고 손이 되기도 한다. 까맣게 잊고 지내서 그렇지 사람도 매한가지다. ‘첫 키스 때는 겨우 혀만 살아있었’고, 어느 땐 귀만 큼지막하게 쫑긋 세웠으며, 동공만 크게 확장되어 전력으로 기능할 때도 있다. 지혜와 자비의 상징인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은 눈이 천개라 온 몸이 그대로 눈이라는 뜻이기도 하거니와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뜻도 담겨있다.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손이 천개라면 못할 일이 무에 있을까. 그러나 꼭 천 개의 손과 눈이 달려있어야 ‘천수천안’인 것은 아니다.
‘단 하나의 천수천안’만으로도 능히 사람의 고통을 살피고 뭇 생명들을 쓰다듬으며 보살필 수 있지 않을까. 누군들 그런 적이 없으랴.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는, 그래서 허물도 뵈지 않고 다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만신을 다 걸고 ‘온몸 단 하나의 손/ 온몸 단 하나의 귀일 때/ 비로소 천 개의 코가 되고 눈이 되고 혀가 된다는 것을’ ‘아예 몰랐다는 듯이 까맣게 잊고 살아’ 그렇지, 다 겪어본 레퍼토리 아닌가. 시인은 바로 그 눈으로 이즈음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지리산 봄 야생화를 흥분, 환희, 황홀로 들여다보고 있다. 어쩌면 그의 몸에 지닌 카메라 렌즈가 천수천안일는지도 모르겠다.
권순진
Rainy Night In Georgia / Brook Benton